친구 결혼식에 여자 사회로 섰다 이렇게살고있어

지난 토요일(9/16) 친구 결혼식 사회를 봤다.
남자들이야 일정 연령 이상되면 결혼하는 친구들의 부탁을 받고 왕왕 사회를 보지만 여자들이야 그런 일이 어디 흔한가. 

그런데 이 커플로 말할 것 같으면, 내가 무려 7년 전 뿌린 씨앗이 열심히 발아하야... 결혼이라는 결실을 맺게 된 데다 내가 알량하나마 연애 칼럼이라는 것을 좀 썼었다는 이유로 결혼식 사회로 나를 지목했다. 친구가 수줍게 "슬티브야, 네가 좀 (사회) 해줬으면 좋겠어"라고 말했을 때 나는 적잖이 놀라면서도 뿌듯했었다. 언제 그런 걸 해보겠냔 말이지. 

식 두 달 전 쯤 청탁?을 받았었는데 까마득히 먼 날의 일인 것만 같더니 세월은 무럭무럭 흘러가더라.

친구가 준 사회 대본을 전날 숙지했다. (미안하다, 친구야)
아주 약간 오글거리는 '지금 이 순간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인 신랑' 등의 멘트만 좀 수정을 하고, 내 소개 멘트도 추가해 넣었다.

사회 경험이 아주 많은 지인들의 말을 여러번 되새겼다. '신부 모르는 일은 절대 벌이지 말라'는 것과 '결혼식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신랑 신부이므로 사회가 나대선 안된다'는 것. '겅중거리는' 사회는 극혐이기 때문에, 충실히 대본을 따르되 아주 약간의 애드립만 첨가하기로 마음 먹었다.

복장은 미리 전에 JJ지고트에서 싸게 산 인디핑크의 레이스 원피스를 점찍어 둔 터였다. 더 단정하게 자켓을 받쳐 입는 원피스라든지, 가 있으면 좋을 뻔 했지만 내게 그런 게 없으므로... 구두는 앞코가 뾰족한 스킨톤의 스틸레토를 미리 사뒀다.


결혼식 당일, 식은 3시 30분부터였지만 나는 신부와 함께 웨딩홀에 딸린 메이크업샵에서 헤어&메이크업을 받기로 했기 때문에 12시까지 부랴부랴 뛰어 갔다. (헤어&메이크업까지 예약해준 친구에게 박수를)

메이크업샵에서 간만에 조우한 나의 대학 동아리 선배였던 친구의 신랑과 반갑게 인사했다. 오빠는 그 시절 날카롭던 인상이 사라지고, 턱 근처에 도로록 살이 붙어 있었는데 그게 또 그거대로 보기가 좋았다. 친구의 어머님과 동생 내외 등과도 인사했다.

친구는 달리 준비 과정을 찍는 찍사가 없어, 그 역할을 일찍 간 내가 대행했다. 친구가 '고맙다'며 준 롯데 상품권으로 구입한 내 디카가 여기서 빛을 발했다.

신부와 신부 어머님, 신부 올케의 메이크업이 끝나고 드디어 내가 자리에 앉았다. 무조건 세팅이 돼 있어야 한다며 화장해 주시는 아주머니가 머리를 미리 말아주시더라...

화장대에 즐비한 화장품들은 다들 낯이 익었다. 웨딩 메이크업의 정석이라는 루나솔 코랄코랄이나 디올 5꿀뢰르의 브라운 계열 팔레트가 눈에 띄었다. 블러셔나 싱글 섀도, 립스틱들은 거진 다 맥?

"신부와 닮았다"며 나를 신부 동생쯤으로 아시던 아주머니는 내가 신부 친구이며 오늘 결혼식 사회자라고 말씀 드렸더니 적잖이 당황한 눈치셨다. 신부 메이크업이나 혹은 한복 메이크업은 자주 해봤지만, 여자 사회자라는 곁가지? 메이크업은 처음이신듯 했다. 한동안 갸웃하시더니 내 핑크색 원피스를 보시고선 "옷이 핑크니까 화장도 핑크로 해야지~" 하셨다. 그러곤 "신부보다는 덜 이쁘게, 얌전하게 하면 되지?" 하셨는데 그게 불상사를 불러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친구 말에 따르면 '온리 스킨'만 바르고 오라는 말에 그 따가운 뙤약볕에도 스킨만 바르고 갔다. 메마른 땅에 단비를 내리듯 아주머니가 미스트 같은 걸 '칙칙' 하셨다. (흡사 분무기 수준이었다.) 그러고는 뭔가가 두텁게 피부에 올려졌다. 살짝 두꺼운 제형의 크림인가 헀는데 그게 파운데이션이었다. 그 가물고 메마른 땅에 미스트 몇 번 뿌리시곤 곧바로 파데... 이 화장의 끝이 사뭇 무서워졌다.

눈두덩에는 은펄의 핑크 섀도, 쌍커풀 라인에는 퍼플... 블러셔도 은펄의 핑크, 입술에도 보라기 낭낭한 핑크. 가을뮤트로 채도가 높고 보랏빛 섞인 핑크가 쥐약인 내게 쥐약인 화장이었다. 그래서 그 날 입은 원피스도 핑크이되 굉장히 톤다운된 인디핑크인건데... 정신이 없어 이것저것 말씀 못 드린 내 탓도 크지만, 속눈썹까지 다 붙이고 완성된 화장을 거울을 통해 봤을 때 흡사 흑화된 한 마리 인간이 앉아 있었다. (얼굴에 바른 파데도 22호쯤 되는 내 피부보다는 상당이 어두운 색상이었다.)

머리는 6:4 가름마를 내서 로우 포니테일로 해달라고 말씀드렸다. 원피스가 하프넥 마냥 목 위로 올라오는 것이어서 무조건 목선을 드러내야 했다. 뽕을 넣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약간 고민됐는데, 그냥 딱 붙여서 해달라고 말씀드렸다. 그 결과 딱 달라붙는 치파오풍의 원피스와 더불어 한 떨기 중화민국st의 100년 전 여성이 탄생했다...

신부가 웨딩드레스 입기 전 한 컷. 그 7년의 세월을 거쳐 결실을 이뤄낸 신랑 신부가 적이 대견했다.

식을 1시간쯤 앞두고 웨딩드레스로 갈아입은 신부가 신부대기실로 향했다. 나도 신부 짐을 부랴부랴 챙겨 같이 향했다. 친구와 친구 어머님 짐을 챙기고 서브 찍사로서 하객들과 친구의 사진을 찍었다. 뒤늦게 오신 신부 아버님과 멀리 포항에서 오신 신랑 부모님도 함께 만났다. 신랑 어머님은 나에게 "정말 좋은 일 하셨다"며 결혼할 사람이 있는지 물으시더니 "없다"는 대답에 "기도할게요~" 하셨다. 네, 어머님. 감사합니다. 저도 기도할게요...

식 20분쯤 앞두고 보무도 당당하게 사회석으로 갔다. 도우미 되시는 분이 나를 흘끔 보더니 "사회되세요?" 하셨다. "네!" 했더니 가슴에 다는 흰 꽃부터 쥐어주신다. 왼쪽 가슴에 달고 도우미의 설명을 들었다. "식전에 개식예고 몇 번 해주시면 되구요. 나머지는 중간 중간 제가 싸인 드릴테니 따라서 하시면 돼요. 신부 드레스 정돈하는 거 잘 봐주시구요." 

도우미분의 싸인에 따라 개식예고를 두 번 했다. 내 목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식장 안에 쩌렁쩌렁하게 울려퍼지는 게 신기했다. 뼛속까지 경상도인인 나는 지금은 서울 사람이 들어도 아리까리?한 수준의 표준말을 구사하지만, 그 시각 내 귓가에 울리는 내 목소리엔 웬일인지 경상도 억양이 심하게 느껴졌다. "잠시 후 3시 30분부터 신랑 xxx군과 신부 ㅇㅇㅇ양의 결혼식이 시작될 예정이오니~"

조명이 꺼지고, 결혼식이 시작됐다. 조명이 너무 어두워 준비해 간 대본이 잘 안보여 당황하는 찰나, 도우미분이 핸드폰 플래시를 켜주셨다. 식장을 찾아준 하객 여러분께 감사 인사를 드리는 동시, 내 소개를 해야 했다. 그냥 친구가 써 준대로 '신랑의 후배이자 신부의 친구'라고 하려다 애드립으로 살짝 고쳤다. "신랑, 신부의 만남을 주선했던 전직 연애 칼럼니스트 슬티브입니다." 함께 온 대학 동기들이 환호성을 질러주었다.


이후로는 적힌 순서대로 쭉쭉쭉. 있는 대로 읊으면 됐기에 딱히 떨 건 없었다. 중간 중간 내 대사가 앞서진 않는지, 신랑 신부의 동태를 파악하는 것 외에는. 의외의 위기는 '신부 아버님의 덕담'에서 왔다. 무대본으로 신부를 키울 때의 소회를 읊으시던 아버님이 본인에게 신부가 얼마나 귀한 딸인지를 말씀하시는 부분에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워메, 큰일난거. 표정 관리가 안되는 새 아버님이 갑툭 말을 끝맺으셔서 더욱이 당황했다. "아버님 덕담에 제가 다 감동 받았습니다"라고 하는 내 목소리가 떨렸다.

축가는 지난해 12월 결혼해 지금은 셋이 된 대학 동기 부부가 불렀다. 하와이로 신행을 가는 부부를 위해 '하와이안 커플'을 준비해 온 신혼 부부가 너무 귀여웠다. 하와이안 커플은 징하게도 가사가 외우기 어렵고 길어... 노래를 부르던 부부가 매우 고생했다.

폐식사에 이어 사진촬영 및 피로연 안내를 하는 것으로 예식은 모두 끝났다. 도합 30분 남짓 됐나. 어리버리하던 찰나, "이 결혼식엔 주례분이 안 계시니까, 대신에 사회자분이랑 셋이서 사진 찍는 걸로 할게요" 라며 포토분이 급히 부르셔서 주례st로 이들 부부 뒤에 섰다. 엣헴, 기분이 요상했다.

문제의 인디핑크 원피스. 전신샷은 의외로 이거 밖에 없네...

식이 끝나고 모여든 대학 동기들이 "슬티브 목소리가 딱 사회 톤이더라~" 라고 해주어 적잖이 뿌듯했다. 그들 중 2명은 실제로 내게 자기네 결혼식 사회를 부탁하기도 했다! (친구들아, 하기만 해라...) 다시 만난 양가 부모님과 그날의 주인공이었던 부부가 고맙다고 하더라. 나는 그저 네가 준 대본을 읽은 것 밖에 없는데...

선배! 내 친구 JB야, 잘 살아라. 내 온 마음을 다해 축하한다.
그리고 이 날의 더없이 중요한 교훈은 앞으로 웨딩홀에 딸린 메이크업샵에서는 메이크업 안 받는 걸로. 다시 사회 볼 일이 생긴다면 이대 앞 메이크업샵에서 받고 갈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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